‘뽀빠이’ 이상용 별세…한국 방송계의 살아있는 전설, 영면하다

대한민국 방송계의 상징적 인물이자, 세대를 아우르는 국민 MC였던 ‘뽀빠이 아저씨’ 이상용이 2025년 5월 9일, 향년 8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은 오랜 시간 그와 함께 웃고 울었던 수많은 이들에게 큰 충격과 깊은 슬픔으로 다가왔다. 방송계는 물론, 시청자들과 다양한 세대의 국민들 모두가 애도하며, 그의 존재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에 의미 있었는지를 다시금 돌아보게 만들었다.

갑작스러운 별세, 그리고 마지막 길

이상용은 5월 9일 낮 12시 45분경, 감기 증세로 서울 서초구 자택 인근 병원을 다녀오던 중 갑작스럽게 쓰러졌다. 인근 병원에서 응급 치료를 받기 위해 서울성모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으나, 끝내 심정지로 세상을 떠났다. 평소 특별한 지병이 없던 것으로 알려진 그였기에,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은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으며, 발인은 5월 12일 오전 9시 40분에 엄수되었다. 그의 마지막 안식처는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가족 선영으로 정해졌다.

‘뽀빠이 아저씨’, 이름보다 더 친숙한 별명

‘뽀빠이’ 이상용 별세…한국 방송계의 살아있는 전설, 영면하다
‘뽀빠이’ 이상용 별세…한국 방송계의 살아있는 전설, 영면하다

1944년 충청남도 서천에서 태어난 이상용은 대전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고려대학교 임학과에서 학업을 마쳤다. ROTC 5기로 군에 입대한 그는 육군 장교로 복무하며 사회 초년기를 시작했다.

그의 방송 데뷔는 1971년 CBS 기독교방송의 MC로 시작됐다. 이어 1973년 MBC ‘유쾌한 청백전’의 보조 MC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방송인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가 대중에게 폭넓은 인지도를 얻게 된 계기는 바로 1975년부터 9년간 진행한 KBS 어린이 프로그램 ‘모이자 노래하자’였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그는 미국 만화 속 캐릭터 ‘뽀빠이’의 이름을 딴 ‘뽀빠이 아저씨’라는 별명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그 별명은 이내 그의 상징처럼 자리 잡았다.

당시의 어린이들은 그의 다부진 체격과 벽돌을 맨손으로 격파하는 퍼포먼스에 열광했다. 건강하고 유쾌한 이미지, 힘차게 외치던 “뽀~빠이!”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다.

‘우정의 무대’와 군인들의 영원한 형님

이상용의 대표 프로그램 중 하나는 바로 MBC ‘우정의 무대’였다. 1989년부터 1996년까지 방송된 이 군 위문 프로그램에서 그는 MC를 맡아, 전국을 돌며 국군 장병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했다. 그는 “군인은 국가의 기둥이다”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젊은 병사들을 격려했으며, 직접 무대에 올라 병사들과 노래하고 춤추며 진심 어린 소통을 이어갔다.

그의 따뜻한 유머와 활기 넘치는 진행은 장병들뿐 아니라 전 국민에게 감동을 주었고, 이 시기 그는 ‘군통령’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된다. 이후에도 그는 다양한 위문공연과 행사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세대를 막론하고 국민과 함께 호흡하는 방송인의 면모를 꾸준히 보여주었다.

봉사와 실천, 방송 그 이상의 삶

이상용은 방송인으로서의 삶 외에도, 다양한 봉사활동과 선행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심장병을 앓는 어린이 약 600여 명을 도운 활동은 많은 이들의 가슴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단순한 홍보나 이벤트성 활동이 아니라, 꾸준히 현장에서 이들을 직접 만나고 도운 그의 행보는 ‘진짜’ 봉사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그는 “방송인은 반드시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 철학은 그가 고령의 나이에도 각종 지역 행사와 자선 활동, 그리고 강연에 끊임없이 참여했던 이유가 되었다. 단순히 스튜디오에 앉아 진행하는 것이 아닌, 직접 현장을 누비며 사람들과 호흡하는 그의 방식은 많은 후배 방송인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억울했던 시련과 조용한 복귀

그러나 그의 인생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1996년, 그가 주도하던 심장병 어린이 수술기금이 유용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그는 검찰 조사를 받게 되었다. 결국 그는 당시 진행 중이던 ‘우정의 무대’에서 하차했고, 방송 활동 역시 전면 중단해야 했다. 이 사건은 그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이듬해인 1997년, 그는 결국 무혐의 처분을 받으며 혐의를 벗었다.

하지만 그는 한동안 방송계를 떠나야 했고, 생계를 위해 미국에서 관광버스 가이드로 일하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런 시간이 있었기에, 그가 다시 방송계에 복귀했을 때 많은 이들이 진심으로 반겼고, 그는 이후에도 여러 방송과 행사에 참여하며 끊임없는 열정과 긍정적인 에너지를 보여주었다.

방송계의 추모 물결

이상용의 별세 이후, 방송가와 연예계, 그리고 다양한 인연을 맺었던 인물들이 줄지어 그를 추모했다. 배우 장서희는 “이상용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내가 없었을 것”이라며, 어린 시절 ‘모이자 노래하자’에서 자신을 발탁해준 고인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 개그맨 엄영수 등 동료 방송인들도 “믿기 힘들 만큼 갑작스럽고, 너무나 안타깝다”며 그를 애도했다.

이처럼 이상용은 단지 ‘국민 MC’라는 타이틀을 넘어, 많은 이들의 인생에 실질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선행에 대한 사회적 인정

그의 꾸준한 봉사와 사회적 기여는 다양한 기관으로부터 공식적인 인정도 받았다. 그는 중앙대학교 사회복지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며 이론적 기반을 다졌고, 1987년 국민훈장 동백장, 1990년 체육훈장 기린장, 그리고 문화관광부장관 표창 등 각종 훈장과 표창을 수상하며 공로를 인정받았다.

다음은 그가 받은 주요 훈장과 표창 내역이다:

수상 연도 수상 내용
1987년 국민훈장 동백장
1990년 체육훈장 기린장
(연도 미상) 문화관광부장관 표창

이러한 공적은 그가 단지 ‘유쾌한 MC’가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실천한 방송인이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건강의 아이콘, ‘뽀빠이’의 진면목

이상용은 건강한 이미지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60년 넘게 매일 3시간씩 운동을 했다는 일화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그가 강조하던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육체에서 나온다”는 말은 단지 구호가 아닌 삶의 원칙이었다.

그는 유튜브 채널 ‘뽀빠이 이상용TV’를 운영하며 온라인에서도 팬들과 소통을 이어갔고, 최근까지도 강연과 행사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활발히 활동했다. 그의 말처럼, 방송인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현장에서 살아 있어야 한다는 철학은 그가 어떻게 삶을 살아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가족과 인간 이상용

이상용은 연기자인 아내 윤혜영1남 1녀의 자녀를 두고 있다. 가족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기로 유명했던 그는, 한 방송에서 “나는 미숙아로 태어나 건강이 약했지만, 운동과 노력으로 지금의 건강을 되찾았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 바 있다.

그는 가족을 인생의 중심으로 여겼으며,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겸손과 봉사를 강조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생전에 보여준 따뜻한 성품과 인간적인 면모는 그를 단순한 방송인이 아닌, 모두의 친구처럼 느끼게 해주었다.

영원한 ‘뽀빠이’, 세대를 아우른 진정한 방송인

이상용은 1970년대 어린이들에게는 듬직한 친구, 1990년대 군인들에게는 따뜻한 형님, 그리고 2000년대 이후에는 어르신들의 친구로 존재했다. 시대가 바뀌어도 그가 가진 유쾌함과 진정성, 그리고 따뜻한 마음은 변하지 않았고, 이는 곧 그가 모든 세대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되었다.

그는 억울한 시련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결국 국민의 곁으로 돌아와 본연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의 인생은 방송인이라는 직업을 넘어, 한 시대의 정서를 대변하고 위로한 ‘이야기꾼’으로서 기억될 것이다.

이상용의 별세는 단지 한 방송인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 시대가 저문 순간이며,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는 한 인물의 마지막 장이다. 그러나 그의 유산은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웃음과 감동, 그리고 선행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회자될 것이다.

진정한 국민 MC, 이상용. 그의 명복을 빌며, 우리 모두 그의 삶에서 따뜻함과 진심의 가치를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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