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심수봉 근황 이력서 그리고 나이

아마 우리나라에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여자 트로트 대표 가수인 심수봉은 1955년 생으로 로, 최근 그녀의 소식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며 안타까움을 주고 있습니다.

사실 심수봉이라는 이름은 본명이 아닙니다. 그녀의 원래 이름은 신민경으로, 요즘 세대들의 이름처럼 세련된 느낌을 주는 이름이었지만, 가수 활동을 하기에는 임팩트가 부족했는지 이름을 바꿔서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심수봉의 이름의 유래

[최신] 심수봉 근황 이력서 그리고 나이
[최신] 심수봉 근황 이력서 그리고 나이
심수봉이라는 이름은 그녀가 어릴 적 한 스님이 내려준 법명입니다. 스님은 ‘수봉’이라는 이름을 쓰면 평생 바꾸지 않고 살 수 있다고 했고, 그렇게 이름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지금 그녀는 개신교 신자라는 점입니다.

잊지 못할 1979년 10월 27일

이런 그녀에게 있어서 1979년 10월 27일은 영원히 잊지 못할 하루일 것입니다. 당시 대한민국은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날은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날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었고, 텔레비전 아침 방송도 없었습니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당시 TV는 저녁 6시부터 밤 12시경까지만 방송을 했기 때문에 간밤에 일어난 일을 아는 방법은 조간 신문을 보거나 라디오 뉴스를 듣는 것뿐이었습니다. 당시 조간 신문에는 ‘박정희 대통령 유고’라는 제목이 실렸습니다. 청와대 바로 아래에 궁정동에 있던 안가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국민의 반응

독재정권 하에서는 흉흉한 소문들이 많이 돌았습니다. 여름이 되면 크리스마스 때 북한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았고, 겨울이 되면 6월에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당시 덕산 제과에서 만든 ‘왕불’이라는 불량식품은 포장지에 북한 간첩들이 아뭐가 들어 있다는 소문이 돌아 결국 이름을 ‘금도리’로 바꿨지만, 이로 인해 사라질 정도였습니다. 대통령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것도 그런 소문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궁정동 사건의 목격자, 심수봉

1979년 10월 27일, 대한민국이 혼돈 속으로 빠져들던 그날, 심수봉은 궁정동에서 사람의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 냄새와 피로 옷이 흠뻑 젖었던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우리가 아는 심수봉이 그 음악적 재능을 마음껏 펼쳐 보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과 시련이 있었을지 당시 그녀는 짐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때 그 사람’, 심수봉을 스타로 만든 노래

심수봉을 이야기할 때 ‘그때 그 사람’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노래는 그녀를 스타로 만들어준 곡이자, 그녀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 노래이기도 합니다.

대학가요제에 참가하면서 그녀가 불렀던 그 노래는 당시 용어로 ‘뽕짝’, 즉 트로트였습니다. 트로트는 젊은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심수봉은 편견을 깨고 본선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당시 영상을 찾아보면 긴장한 듯 평소보다 노래를 잘 부르지 못했지만, 피아노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부르던 그녀의 노래는 영혼을 울리는 마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대학가요제 이후의 활동과 ‘그때 그 사람’의 인연

비록 대학가요제 본선에서 수상하지 못했지만, 이후 그녀는 ‘그때 그 사람’을 발표하며 데뷔하게 됩니다.

소문에 의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그 노래를 좋아해 음반을 사들여 돌렸기 때문에 음반판매가 급증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소문이지만, 생애 마지막 날까지 이 노래를 좋아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때 그 사람’은 대통령의 도움 없이도 방송만 조금 타면 크게 히트할 수 있는 노래였습니다.

심수봉의 고난과 시련

심수봉은 1993년 SBS 주병진 쇼에 출연해 그 소문이 가짜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녀는 “아무리 못생겼다고 사람을 불러놓고 병풍 뒤에서 노래를 부르라고 하는 인심이 한국에 어디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과 비슷한 시기에 방송에 종종 나오던 노래가 또 있습니다. 바로 ‘여자이니까’라는 곡입니다.

1970년대에는 도쿄 테리라는 서울에서 알아주는 호텔이 있었는데, 심수봉은 대학가요제 출전 이전부터 이곳 나이트클럽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던 무명 가수였습니다. 나훈아는 그녀의 노래를 듣자마자 매료되어 그 자리에서 음반 집을 주선하기도 했습니다. 음반은 무산되어 나오지 못했지만, 그때 녹음하려고 했던 ‘여자이니까’는 ‘그때 그 사람’과 함께 히트했습니다.

또 다른 히트곡 ‘여자이니까’와 ‘순자의 가을’

이 노래는 최용기 작사, 작곡으로 되어 있습니다. 나훈아의 봉명이었습니다. 그녀의 노래가 얼마나 훌륭했으면 그가 각오까지 써 주며 데뷔를 추천했을까요?

이 시기에 심수봉은 ‘순자의 가을’이라는 드라마에 자작곡 주제가도 불렀습니다. 하필 여사님의 이름이 순자였습니다. 당연히 노래는 금지곡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녀가 이후 당할 고통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금지곡과 심수봉의 시련

심수봉은 단지 그때 그녀였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감금되기도 하고 방송 출연 정지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정신적으로 바닥에 있던 시절 그녀는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하는 아픔도 겪으며 극단적 선택까지 하기도 했습니다. 방송 출연 금지를 당해 절치부심하며 세월을 보낸 끝에 해금되었고, 1984년에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발표하게 됩니다. 경쾌한 리듬을 타고 흘러나오는 흐느끼는 여자의 이야기가 심수봉의 목소리와 절묘하게 어울립니다. 오랜만에 돌아온 심수봉은 이 노래로 단번에 스타 자리를 되찾았습니다.

큰 히트였습니다.

또 다른 금지곡 ‘무궁화’와 소문

그런데 이제 심수봉이 마음껏 음악 활동을 하나 보다 했던 것도 잠시, 그녀가 발표한 ‘무궁화’가 또 금지곡이 되었습니다. 심수봉은 제작비도 건지지 못해 또다시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음산한 콧소리로 망자의 혼이 찾아온 듯 부르던 그녀의 노래 때문에 이 노래가 박정희 대통령을 회상하는 노래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 노래를 들은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한창 자신이 부각되어야 할 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듯한 이 노래가 섬뜩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심수봉의 영적 경험과 예지력

심수봉은 과거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낮에 다른 사람들이 한 얘기를 꿈으로 보는 능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전 동네가 지대 높은 한강변이었는데 그곳에서 8명 정도가 자살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누가 죽기 직전이면 내가 맞고, 없는 것 다 밤마다 공포에 질려서 울었다. 사실 지금까지도 예지력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사실 소리에 민감한 뇌신경염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다. 노래는 당연하고 어떤 소리도 듣지 말라고 해서 16세 때 데무이라는 곳에 요양을 간 적 있다. 당시에는 신기가 있다, 귀신 들렸다는 말도 들었다. 예민하고 영이 맑으면 그렇게 된다더라”고 덧붙였습니다.

12·12 사태와 심수봉의 고백

또 심수봉은 12·12 사태에 대해 “그 사건 이후 나를 만났다는 이유로 내가 아끼던 사람들이 어디론가 끌려가 심하게 고문을 당했다. 나는 남편이 고통스러워 하는 소리를 바로 옆방에서 들었는데 이후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 한 달 가까이 감금됐고, 정신병자가 아니라고 해도 그들은 나를 가두고 약물 주사를 놨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심수봉의 새로운 시작

이렇게 굴곡진 삶을 살아온 심수봉. 이제는 과거의 아픔을 뒤로하고 노년에 접어든 그녀의 인생에 앞으로는 즐거운 날들만 펼쳐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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